CHILDREN’S VOICE ▶▶
엄마, 왜 자꾸 나를 모르는 사람들한테 데려가는 거예요? 무서워 죽겠어요, 저 사람은 왜 나를 보고 계속 웃어요. 웃으니까 더 무서워요. 어어 내 손가락을 만지네. 엄마 구해줘요! 나를 해치려나 봐요. 으악! 나보고 저 사람한테 안기라고요? 안 돼! 저 사람한테 안기면 난 죽을지도 몰라요.
MOMMY& DADDY’S VOICE ▶▶
얘가 왜 이렇게 성격이 까다로워. 도무지 외출을 할 수가 없네. 누가 저를 잡아먹기라도 하나, 예쁘다고 쳐다보기만 해도 악을 쓰고 우니, 나 원 참 민망하고 창피해서 나갈 수가 있나. 저렇게 악을 쓰며 울고 나면 몸은 또 얼마나 상할까? 경기라도 할까봐 걱정이야. 어휴, 내 팔자야. 내가 외출을 하지 말아야지.
‘싫어서’가 아니라 ‘해칠 것 같아’ 무서워요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관계는 대개 여러 개의 동심원 모양이 된다. 동심원의 정중앙에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서 있고,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그보다 조금 덜 중요한 사람들이 위치한다. 누구나 이런 동심원을 가지고 상대에게 얼마나 친밀도를 형성할지, 상대를 얼마나 믿을지, 나 자신을 얼마나 공개할지를 결정한다. 가족과 같이 처음부터 동심원의 정중앙에 위치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동심원의 가장 바깥 원에 있다가 시간과 추억이 쌓임에 따라 중심과 가까운 위치로 이동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을 동심원의 어느 위치쯤에 놓아야 할지 매우 자연스럽게 결정한다. 낯가림은 이런 사람과의 관계를 배우는 초보적인 발달단계이다. 낯가림은 친숙한 사람과 아닌 사람, 안전한 사람과 아직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사람을 구별해내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낯가림이 생겨나는 이유는 안전하고 익숙한 사람과 안전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구별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경계하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낯가림은 생후 6개월부터 생겨나는데, 처음에는 ‘낯선 사람’에 대한 반응이 거의 공포 수준이었다가 점점 약해져 두 돌 정도면 대부분 사라지게 된다.
부모들도 낯가림이 정상적인 발달과정의 하나라는 것쯤은 모두 알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생후 6개월 정도 지나 낯을 가리기 시작하면 ‘뭐 그런가 보다’ 하면서 이해한다. 그런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하거나 다른 아이들은 다 없어졌는데 우리 아이만 여전히 남아 있으면 부모들은 생각보다 많이 힘들어한다. 아이가 어딜 가든 처음 보는 것(사람이든 집이든)만 있으면 울기 때문에 조금 민망하도 하고,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아이가 울다가 병이라도 날까봐 걱정도 된다.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면 조금씩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리다 나중에는 아예 외출을 안 해버린다. 엘리베이터, 길거리 또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만나는 사람 등 어찌 보면 세상은 온통 낯선 사람 투성이기 때문이다.
진료실에서 만난 한 엄마는 낯선 사람을 피하기 위해 놀이터조차 새벽이나 저녁시간을 이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만약 아이가 유독 시댁 식구들에게만 낯가림이 심하다면, 엄마들의 입장은 이만저만 난처한 것이 아니다. 가뜩이나 민망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데 시어머니가 남편한테 “에미가 시켜서 저러는 거 아니냐?”라고 한 말씀하시면 서럽기까지 하다. 반대로 아이가 시댁 식구한테는 낯을 가리지 않는데, 친정 식구한테만 가리면 엄마 입장에서는 묘한 서운한 감정이 생긴다.
아이가 낯가림이 심할 때, 부모들이 쓰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나도 그 상황이 불편하고 아이도 힘들어하니 아예 낯선 사람을 만날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낯가림으로 인해 대인관계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 아이가 불편하고 힘들어해 일시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할지라도 모든 자극을 차단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어쨌든 대인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한다. 낯가림은 바깥세상과의 접촉에서 파생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정상적인 발달과정인 만큼 잘 겪어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아야 한다. 나머지 하나는 더 많이 낯선 사람을 만나게 함으로써 스스로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낯가림이 심한데도 계속해서 아이에게 자극을 주면, 아이는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변해버린다. 낯가림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해지고 매사에 예민하고 과민한 아이가 된다.
아이의 낯가림을 다루려면, 먼저 낯가림을 하고 있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지금 아이의 마음은 ‘싫어’가 아니라 ‘아~ 안전하지 않아. 두려워’이다. 아이 마음속에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해칠 것 같다는 근본적인 공포감이 있다. 어둑어둑한 회사 사무실을 지나가는데 모르는 사람과 마주치거나, 늦은 밤 엘리베이터를 혼자 탔는데 다음 층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이 타면 어른들조차 ‘저 사람이 나를 해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두려움과 경계심이 생긴다. 그때의 그 감정이 바로 아이가 낯가림을 할 당시 드는 심리 상태와 같다. 아이는 너무너무 무서운 것이다. 성격이 까다롭기 때문도 아니고, 상대방을 싫어해서도 아니다. 그저 참을 수 없이 그 상황이 공포스러운 것이다. 생명이 위협당할 만큼 위험한 상황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는 부모가 어떻게 해주기를 원할까? 아이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부모가 나의 두려움과 경계심을 낮춰주기를 바란다. 앞에 서 있는 낯선 사람이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기를 바란다.
부모들은 “괜찮아. 할머니가 너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또는 “어머, 네가 좋아하는 초콜릿 주네. 가서 한번 안겨봐” 등 아이가 그 낯선 사람에게 호감을 보이게끔 여러 가지 방법을 너무 급하게 동원한다. 또한 몇 번 이런 식으로 달래서 되지 않으면 부모 자신이 당황해서 아이를 막 야단치기도 한다. “너 갑자기 왜 그래? 네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널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사랑하시는데 네가 이러면 되겠어!”라고 일장 연설까지 한다.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고의 차원이 아니라 자주 보지 않아서 낯설고 본능적으로 안전하지 않다고 느껴서 공포심과 경계심이 발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위험한 상황일 때 나를 보호해주어야 하는 부모가 그 마음을 이해해주기는커녕 “너 때문에 아빠가 창피해서 외출을 못하겠다. 가자!” 하면서 소리 지르고 화를 내버리면 아이는 두려움이 가중되어 그 경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없다. 아이는 다음에도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아이가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을 낮추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 동안 부모들은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되도록 가라앉히면서 기다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가 그 경험을 좋은 방향으로 돌려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아이가 좀 심하게 악을 쓰면서 울 때는 그 자리에서 아이를 안고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안고 나가버리면 다시 들어오려고 할 때 또 운다. 일단 집 안에 들어온 상태라면 절대 자리 이동을 하지 말고, 가만히 아이를 안고 있는다. 그때 주변 사람들도 아이를 쳐다보거나 말을 걸지 말아야 한다. 그것도 자극이다. 낯선 사람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아이는 지금 자신에게 가해진 자극을 어렵지만 처리하는 중이다. 그런데 새로운 자극이 추가되면진정할 틈이 없다. 예를 들어, 아이가 악을 쓰면서 울고 있는데 옆에 있는 고모가 “슈퍼마켓으로 사탕 사러 갈까?” 하면 아이는 ‘가뜩이나 무서워 죽겠는데, 무슨 슈퍼마켓이야? 지금 저 사람이 나를 데려가려는 거야? 으악 더 무섭잖아’.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더 울게 된다. 낯가림이 심할 때는 모두가 아이와 멀찍이 떨어져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 된다. 그동안 엄마는 아이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작은 목소리로 “괜찮아”라고 말하며 아이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엄마가 아이를 달래다 보면, 아이도 한참 울다가 지친다. 울다 지쳐 자신의 주변을 한번 둘러보게 되는데 그 시간 동안 누구도 자신을 위협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면 좀 진정된다. 낯가림은 안전하다는 경험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자꾸 달래려고 아이에게 많은 것을 제안하면 안 된다. 어딜 가자고 하거나 무얼 준다고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이에게 낯선 사람, 낯선 상황은 안전하지 않은 것이다. 낯가림이 심한 아이가 나를 보고 운다면, 그것에 대해서 ‘혹시 쟤가 날 싫어하는 것 아니야?’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약 아이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다면, 그때는 전문의의 진료를 받아보도록 한다. 사실 낯가림이 전혀 없는 것도 문제다. 낯가림이 전혀 없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익숙한 사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람은 낯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구별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 낯선 사람과 친해지는 데는 반드시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너무 금방 친해지는 사람은 피상적인 관계만 맺을 가능성이 많다. 금방 친해지는 사람들은 상대가 꼭 그 사람이 아니어도 될 가능성이 높다. 친구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중학교 3학년 여자아이가 있었다. 누가 보아도 그 아이는 대인관계가 원만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아이에게는 그 또래라면 누구나 하나씩 있는 죽고 못 사는 단짝 친구가 없었다. 아이는 그 이유가 항상 궁금했다.
나는 아이에게 질문을 했다. “친구가 ‘나는 있잖아, 내가 좀 못생긴 것 같아’라는 고민을 말하면 너는 뭐라고 대답하니?” 아이는 “글쎄요. ‘아니야 너 예뻐’라고 말해주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아이의 대답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방이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대해주기를 원한다. 아이의 대답은 원만한 대인관계에서는 최선일지 모르지만, 친구한테 ‘나는 너를 특별하게 생각해’라는 메시지를 주지는 못했다. 갈등이 벌어지지도 않았고, 친구의 기분이 상한 것도 아니지만 매번 그런 식이면 그 친구도 나를 각별하게 대하지 않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한 관계를 원하기 때문에 특별한 충고를 원한다. 좋은 것이 좋은 거란 식의 충고는 누구에게나 해줄 수 있는 ‘깍두기 답’이다. 그런 대답을 들은 친구는 ‘이 친구에게는 내가 아니라도 상관이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되면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부모들은 아이가 낯을 가리지 않으면 ‘적극적이고, 외향적이고, 사회성이 좋다’고 생각하고, 낯가림이 심하면 ‘성격이 별나다, 까다롭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낯가림은 그런 성격을 나타내는 척도가 아니다. 병적인 것만 아니라면, 나는 ‘낯가림’ 자체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본다. 사람을 사귈 때 낯을 좀 가리고 쭈뼛거리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 과정을 잘 거침으로써 대인관계에 있어서 어떤 깊이나 구분이 건강하게 생기기 때문이다. 좀 더 중요한 사람, 좀 더 내가 시간을 할애하고 배려해야 하는 사람을 구분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만나는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모두 같은 깊이로 대할 수는 없다. 똑같아서는 안 된다. 자기 나름의 등급이 있어야 한다. 낯가림은 그런 것들의 기초다.